우연히 평광교회 창립40주년사를 보다가 열두번째의 이야기 글에서 언급한 대구 평북교회와
남성교회가 결국은 같은 교회임을 알게 되었다.(평광교회 40주년사 42페이지 25째 줄)
서울의 평북교회가 평광교회로 이름이 바뀐것처럼...
머리에 간혹 이상한 느낌이 들고 어지러우면 아직 마무리 하지 못했음에 마음이 급해지기는 한데...
타고난 게으름은 어쩌지를 못하겠다.
열세번째를 빨리 쓰긴 써야겠는데 LACC 정기공연전인 4월초에... 홈콘서트가 있어서 노래
익히고 가사외우기에 정신이 없다가 취소 됐다는말에 한시름 놓았는데 이번엔 단원중 한사람의
졸업연주에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다하여 여유에 사치부릴 틈이 없다.
그래도 쓰자. 나와의 약속인데...
나의 가정에 둘째가 태어났다. 이번에도 아들이다.
고려대병원에서 태어났는데...내 인생에 딸은 없나보다. 차라리 잘되었다.
먹는거에만 한사람분 추가하면 될테니...
근데 이녀석이 날,꼼짝못하게 만든다.
나는... 자식이 생기면 군인처럼 절도 있고 씩씩하고 예의 바른 사람으로 키우고 싶었다.
유난히 칭얼대는게 싫었다 가차없다. 주위에 사람이 있건 없건 상관하지 않았다.
남의 시선이 나의 아이를 올바르게 가르치는건 아니니까
대개 밖에 있을경우 너, 집에 가서 보자 아니면 집에 있을 경우 손님들 가신 다음에 보자하는데...
이경우 내가 깜빡 잊어버려서 없던게 되던가, 아니면 아이가 시간의 그림자 뒤로 숨어버려서
정작, 지금 잘~ 놀고있는 아이에게 조금전의 그상황을 설명해주고 혼내기란...내가 못하겠다.
그래서, 바로바로 혼내다보니.. 큰 아이의 기를 너무 죽인게 아닌가 후회가 많이 되었다.
그래서 둘째한테는 많이 너그럽게 대했다.
뭐든 먹을때마다 싫다고 안먹다가 남들 다 끝난후에 입에 대보고 그때서야 먹기
시작해서 더 없냐고 하는데... 다 먹은 내가 미안하고 황당했었다.
그 다음부터 아이가 더 달라고 할까 싶어 난 먹기 시작도 못하겠다.
그리고 또 얼마나 이쁘게 노는지...둘째는 나한테 매미처럼 매달려 살았다.
둘째의 사진을 보면 똑같은 포즈로 찍힌 사진이 없다. 언젠가 연예인 이홍열씨가 사회를 본
모 콘테스트에 나가서 탤런트부분과 모델부분에서 각각 2등을 하기도...
서울, 아버님 집에 올때 고속버스 안에서까지 사투리를 쓰던 아이들이 서울에 도착하여
버스에서 내리면 바로 서울말을 쓰는 게 참! 신기했다. 물론 대구로 갈땐 그 반대였고...
자기자식이 안 이쁜사람이 어디 있을까? 마는 극성떠는 부모를 난,이해 못하겠다
세상 이치대로 물흐르듯 자연스럽게 둬 두면 될것을 자기의 잦대에 맞추려는 심보는 뭔지?
아이들이 힙합바지를 엉덩이에 걸치고 거리를 쓸고 다닐때... 늙어서 저러면야 큰 일이지만
젊었을.. 지금, 하는게 얼마나 다행이냐? 그리고 지금, 안 해 보면, 언제 해 보겠냐싶은게
남에게 피해주지 않고 자신의 건강을 해치지 않는 한도내에서는 뭐든 응원 해 주고 싶다.
대구에 있는동안 전국 출장을 딱 한번, 본점의 양장담당, 이oo사장님과 함께 나섰다.
둘째 날, 전남,광주의 거래처에 들렀다. 난 경상도만 관리하므로 구태어, 점방 안으로 들어가서
이 곳의 사람을 알 필요가 없기에 그냥 밖에서 운전기사인 김기사와 있었다.
그때 군인,하나가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게 보였다.
공수부대 복장이였는데... 어깨에 지휘관 견장도 있고
언듯, 내 친구같다는 느낌에.. 그냥, 이름을 불러봤다. 근데, 멈춰서더니 뒤 돌아보는데...
맞다. 야! 니가 여기 웬일이냐?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예상할 수 조차 없는 친구와의 만남.
둘러봐도 들어 갈 만한 곳은 없고 옆에 구멍가게에 들어가 앉아 잠시 서로의 안부를 묻다가
김기사가 와서..가야한다기에 5분도 안돼 다시 헤어져야 했던 내친구 충남 금산사람, 송기인.
그때가 광주사태 며칠후였는데...아무래도 공수부대 복장이 마음에 걸렸다. 계급이 높았다.
이 친구하곤 대학 같은 과동기이니 전공으로 봐도 그렇고 다른 동기를 봐도 통신쪽이라
아닐텐데도... 혹시 너도 그 당시 거기에 있었는지를 차마 못물어 봤다.
후에 대구,나의 집으로 편지가 한번 왔었는데 ..답장을 보내진 않았다.
그 친구를 이후에 본 적이 없다. 아직까지..
처음,대구에 갔을땐 대구 사무소에서 쓰던 포니 웨곤승용차가 있었다
그런데 내가 대구에 상주하게 되자 달라고 하지도 안았는데 나에게 키를 줘서 내가
그 차를 가지고 다니게 되었다.
아버님의 바램과는 달리 거의 매일 술을 마시고 지내던 내가 아침마다 아파트 복도에
나가서 하는게.. 간 밤에 차를 어디에 세웠는지 내려다 보며 찾는 일이였다.
불가사의하게도 차는 항상 네모 칸 안에 반듯하게 다친데 없이 주차되어 있어서
나를 놀라게 하곤 했었다.
몇년을 그렇게 잘 타던중 어느 날 갑자기 이 차를 서울 본사로 보내라고 ...
나중에 들은 바, 아버님께서 그 차를 평광교회에 업무용으로 헌금하셨다고..
네째의 결혼식 하루 전날, 출발하려고 아침부터 준비를 마치고 신발을 신는데..
동성동의 거래처 김사장으로 부터의 전화. 싸게 나온 중고차가 있다고 ...
현관에서 아이들에게 신발, 신기고 있던 아내에게 잠깐 기다리라고 하고선
한번 시운전 해 보고 결정했다.
이렇게해서 생긴 내생애 첫번째 애마가 포니 액셀이다.
당연히 그차의 새로운 생일은 내동생네 결혼기념 하루전날.
서울,강남 고속버스터미날에 내려서 택시잡기가 너무 힘들어서...
당연히 줄서서 기다려 순서가 되어 타려고 하면 후암동이라는 말에 가까워서 그러는지
거의 다 승차거부하는 바람에 너무나 열받았던 기억에 결정을 쉽게 했다.
그 중엔 아이 안고 왔다갔다하는 내모습을 자기의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보고 안스러워서
태워줬던 몇분의 착한 기사분들도 계시긴 했지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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