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나의 이야기 ~~ 열 한번째

chevy chevy 2008. 4. 9. 16:03

 

  

 그리고  2년후, 나의 가족과 함께  아버지의 집을 떠나 대구로...유배아닌 유배를 떠났다.

 

그때, 미국 이민 수속중이였는데..

 

아버님회사에 사과와 섬유로 유명한 대구에 주재원이 4명 있었다.

 

그중, 숙녀 복지를 담당하던 사람이 사직해서 공석이니 이민가기까지 거기서 일하라는

 

것이였다. 처음엔 거절했지만  집,한채라는 낚시밥과 한 집에 같이 살고있는 큰 형네와

 

부딛치기가 싫어서  경북,대구로 이사를 했다.

 

나중에 알았다. 대구에서 날 붙잡고 서울엔 절대 가지 못하게 하라는...

 

아버님의 전화가 있었다고.. 하지만 난, 이미 아버님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먼지, 많은 종로4가,지하상가에서 숨 쉬며 장사하고 있던 나를  안스러워 하셔서

 

거기에서 꺼내 공기 좋은  다른 곳으로 보내고 싶어 하셨다는 것을...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술,좋아하고 친구,좋아하던 세째를  술과 친구에게서 떼어

 

놓으려는 심사도 있으셨겠지만..그 것때문에  어떤 제약을 받거나 불편했던 적은 없었다.

 

하지만 약간의 효과도 있었을 것이다. 덕분에 친구들과는 연락이 다 끊어졌다.

 

부작용으로  좋은 녀석들까지도...

 

결혼전, 부모님과 함께 살때 형제들 중에서 유독 나만 술,담배에 외박하고

 

아예, 일주일을 나가 있었어도 가족들은 내가 집에 들어와서 잤는지 아닌지도 모르는

 

눈치인게 아들이 많다보니 세째한테 까지는 관심을 둘 여유가 없었나 보다.

 

그러던 내가 결혼하고  달라진 게 있다면 외박이라는 걸 내 사전에서 지웠다는 것이다.

 

특히, 대구로 이사와서는 어디로 출장을 가던 무슨 방법을 쓰던 날이 새기전에

 

반드시 집으로 와서 잤다.

 

밥은 아무데서나 먹어도 상관 없지만 잠만은 꼭 집에서 가족과 함께 하기로 마음먹었다

 

밤,열두시 통행금지 시간은 나한텐 자리를 털고 일어 날 이유외엔 아무 의미가 없었다.

 

한번은 겨울에, 버스를 타고 대구에서 혼자 포항으로 출장을 가던 중 눈이 엄청 내렸다.

 

불현듯,되돌아 나올 걱정에 포항터미날에 도착하자 마자 매표소에 대구행,막차가

 

언제인지?  물으니 앞의 버스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 차도 출발할 수 있을 지?

 

모르겠다고...해서 바로, 손가락으로 가리 킨 버스로 바꿔 타고 볼일도 못 본 채 

 

엉금엉금 기다시피 집으로 오기도 했다.

 

 

 어느 해 식목일, 서울에선 실제상황이라고 비상 경계경보가 울리고  난리가 났었는데..

 

북쪽에서 이웅평이라는  공군장교가 미그기를 몰고 귀순한 사건이였다.

 

내 생각엔 우리 나라 역사상, 나의 아버님의 시대만큼 어려움을 겪은 세대가 없을

 

것만 같다.

 

지옥,같은 일제시대를 지나자  온 나라가 뒤집어 지는 동족 상잔의 시대가 기다리고

 

있었으니... 태어 나면서부터  죽을 일만  널려 있고 믿을 것이라고는 가까운 곳에서

 

찾아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믿을 것이 무엇이 있을까?  나의 아버님의 경험상 그중 하나가 식량이

 

였던가 보다.  여러사람이 피난가게 되면 절대적으로 더 많은 식량이 필요하니...

 

쌀, 사놓으라고 20만원씩,  내가 알기론 대구직원들 한테만 지급되었다. 

 

그 당시 월급수준이 25만원인가? 였으니.. 우린 보너스 받는 기분이 였고 남북관계가

 

험악 할 때마다 이런 일이 되풀이 되었다.

 

 

  집에 전화를 놓았다. 이때까지도  전화회선의 적은용량으로 전화가 귀하던 때라

 

전화국에 신청하면  순서대로 설치하고 번호를 주는데.. 시간이 많이 걸려서

 

개인끼리 사고 파는 백색전화라는게 있었다.

 

전화국에 신청하는 걸 청색전화라하고...

 

백색전화를 샀는데...우리보다 앞서 이 전화를 갖고 있던 사람이 하던 사업이 부도가

 

났던가 보다. 세무소에서 세금을 받으려고 재산을 찾다가 이 전화회선를 차압했다.

 

문제는 전화의 명의가  아직 그 사람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우린 손쓸 방법도 없이

 

빼앗꼈다.

 

하는 수 없이,전화명의의 사람에게 돈을 돌려 받기위해 하루 시간을 내서 전 소유주의

 

주소지인 팔만대장경이 있는 해인사로 가는 길목의 고령으로 찾아갔다. 

 

물어 물어 시장통, 남의 가게 앞에서 양은 다라이 몇개 놓고 채소 노점하는 그사람의

 

부인을 찾았다.  부인을 찾아 간 것은  물에 빠진 놈,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그 곳엘

 

갔었던 건데.. 일년에 한,두번 집에 올까말까한 사람을 어떻게 찾아왔냐고 물어오는

 

그 여인네한테서 생활의 궁핍함을 느끼며 세무소사람도 겨우 찾은 게 전화회선이 였던가

 

보다 싶은게.. 점점  답답해지고 있었다.

 

근처, 적당한 곳에 걸터 앉아서 이제 어떻게 하지? 하며  대책없는 생각을 하다가 ...

 

아까부터 그 여인네의 잔등에 포대기에 싸인 채 업혀져서 허리가 잔뜩 뒤로 젖혀져

 

있는 아기를 보고... 그래.. 난 그 인간한테 50만원 떼인 걸로 끝이지만  저 여인네와

 

아기의 저당잡힌 인생은  끝이 보이지 않는구나 싶은 게...

 

그냥, 집에 가자하며 일어나 주머니에서  2만원인가? 를 꺼내 애기 우유 사 먹이라며

 

여인네의 손에 쥐어주고 무거운 발걸음을 대구로 향했다. <계속>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의 이야기 ~~ 열 세번째  (0) 2008.05.05
나의 이야기 ~~ 열 두번째  (0) 2008.04.09
나의 이야기 ~~ 열번째  (0) 2008.03.29
나의 이야기 ~~ 아홉번째  (0) 2008.03.18
나의 이야기 ~~ 여덟번째  (0) 2008.0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