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생각?

이제는.. 말,할 수있다..

chevy chevy 2012. 10. 16. 03:50


내가.. 이민 후,  한국을 처음 방문한 것이 나의 아버님께서 70세가 되시던 1992년 2월이였다.

그때의 기억들은 싸그리~~  다시 생각하고 싶지않은 것들이지만..


1959년부터 살기 시작했던.. 후암동의 부모님 집이 내가 이민 후, 4~5년을 거기서 더~사시다가

거의 30년을 채우고 압구정동으로 이사하셨으니.. 집의 위치를 모르기도 했지만..

동생인, 넷째가 인천공항으로 마중나온 덕분에 편하게.. 그리 갔었다.


*


그리고, 나에겐.. 같은 증조부 할아버님을 뿌리로 하는 고모님이 계셨으며

그 분의 자녀들이 나와는 족보상 같은 댓수인데..  그 중, 창순이 누나가 있었다.


나의 부모님께선 해방직후, 월남하셨지만  625전쟁후, 이남에서 찾은  친척 2~3분중에

고모의 존재를 알게된것이 내가 중학교때 쯤이니..


그때부터 누나를 알고 지낸것이다.

나보다 3살 위로 눈썹이 찐하고.. 조용했으며  여리여리하고 이쁘게 생긴 천상, 여자였다.


참고로.. 그당시 사회분위기는.. 월남기술자들(75년 패망)에 이어 중동건설붐으로

많은 남자들이 중동에 돈 벌러가고 한국에 남은 부인들의 일부 탈선 문제가 언론을 장식했었다.


*


2주간의 방문기간 중 어느 날,

언제 또, 모국에 올지 알 수없고 누나가 결혼 한 후로 첨인데,

마침, 집근처라.. 현대 아파트에서 살고 있던 누나의 집을 방문할 생각을 했다.


친 누나도 아니고 친척일뿐인데 결혼 후엔, 출가외인이란 생각이 지배적이라 피차 왕래가 없었으니..

풍문에 잘~살고있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전화통화를 하고 점심시간을 훌쩍 넘겨 과일을 사들고 누나의 집을 방문했을때,

슬하에  중, 고등학교에 다니는 지 여튼, 그만한 두(?) 아들도 함께 있었다.


오랜 만에 대면이라.. 반가움에 부엌식탁을 두고 마주 앉아 사는 얘기를 나누던 중에

매형이 퇴근하여 집으로 들어왔다.


설명을 좀 하자면.. 사실, 매형과 나는 첨보는 순간이였다.

내, 아는 거라곤.. 나의 큰 형님이 중신을 하여 결혼을 한 거로 알고있는 정도??

그리고, 여기선 공개할 수없는 집안의 문제가 있다는 거.


이유는 모르지만 여튼, 결혼식엔 안갔으니..  서로 얼굴을 몰랐다.

누군지를 설명하고 같이 앉아 한참동안 수다를  떨다가 저녁시간이 되어 집을 나왔다.



그리고, 10년이 지나 2002년,

아버님께서 위독하시다고 해서 나 혼자 한국에 갔었다.

내가 도착했을때도 이미, 의식이 없으셨지만.. 3일만에 아버님께서 돌아가셨다.


소식을 듣고.. 그 노인병원으로 창순이 누나가 여동생하고 같이 왔었는데..

나하고는 한 번도 눈을 마주치지 않아 인사도 할 수가 없었다.

의식적으로 안 보려는 듯 바로, 앞에 있었슴에도.. 난, 완전 투명인간이였다.


장례식하는 날도 마찮가지였다.

이 누나하고는 어려서도 친했었으며 

근래로 따져도 10년만에 만남이였고 위로를 받아야 하는 자리였는데..


그래서, 생각을 해봤다.

내가 1992년 집으로 방문했을때, 사회 분위기상

매형,자신이 모르는 놈을 집안에 들였다고

누나가 얼마나 괴롭힘을 당했으면.. 일부러 눈도 안 마주칠까..??


굳이 해명을 하자면.. 누님이야 말로 매형하고 내가 서로 알고 있는 줄 생각했겠지

그리고, 내가 대문을 나서는 순간.. 나의 큰 형님한테 바로, 확인 전화도 했을테고..


그랬슴에도..


얼마나 찌질했으면.. 또, 얼마나 긁어대고 힘들게 했으면..

10년만에 만난,  아버님의 세상떠남으로 힘든 친척 동생중 나만 안보이는 실명을 하게 됐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기분은 드럽고

두고두고.. 20년 전의  방문을 후회하게 만든 이 넘을 매형이라 부르기는 나도 싫다.


< 이  글을 볼 일도 없겠지만.. 보게 된다면 어떤 짓을 했는 지.. 알라고 실명으로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