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버님께선 평안북도 철산에서 태어 나셨다. 한일합방이 1910년이 였으니...
나라의 자주권을 잃고 남에게 지배를 당하며 36년을 사는 동안의 초반 막바지인 1922년 2월22일이였다.
사회의 모든 방면에서 일제가 자리를 확고하게 잡았고 그런 분위기속에서 이미, 러일전쟁에서의
승리로 한껏 고조된 일본은 대륙으로의 침략을 멈출줄을 모르고 그 범위를 점점 더 넓혀 나가고 있었다.
평화시라고 해도 피지배자의 생활은 참혹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이였을 텐데...
지배자인 일본이 여러 곳에서의 전쟁을 주도하고 있었으니 ...
그 미치광이들의 뒷치다거리를 해야 하는 우리 백성의 피곤함은 여기에 글로써 표현할 수 조차 없다.
소년, 정학선은 어려서 부터 교회의 집사인 모친의 영향을 받아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였다.
이때만해도 우리나라에 정식으로 기독교가 들어온지 불과, 얼마되지 않았을 때인데 여자인 모친께서
집사가 되어 교회에 열심일 수 있었던건 전적으로 하나님의 큰 축복일 수 밖에 달리 설명할 수가 없다.
희망이라곤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상황에서 젊은 사람들은 젊은사람들대로 나이깨나 먹은 사람들은
또, 그들대로 답답함을 술로써 노름으로 그러다가 서로 주먹질이고... 주위를 둘러보면 한심할 뿐이였다.
그렇게 무심한 세월을 하릴없이 보내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
예배당에 출석하며 하나님을 열심히 믿는 사람들은 술,담배는 물론이고 노름을 멀리하기에...
아침일찍 서둘러 일터인 논,밭으로 나아가
시기를 놓치지않고 적당한 때에 퇴비를 뿌려주어 땅심도 튼튼하게하고 또, 잡초인 피도 뽑고
고랑도 잘 다듬고 하니 보기에도 논과 밭이 질서가 있고 잘 가꾸어지기에 수확도 당연히 많았으며
할당된 공출양을 제하고도 살림이 넉넉하였다.
소년, 정학선의 눈에는 이런 질서있고 성실한 모습에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생활방식이 맘에 들었다.
가난한 집안은 아니였지만...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나자...
큰아버지께서 할아버지의 재산을 독차지하고
둘째이셨던 분과 세째며 막내인 아버지께는 아무 것도 나눠 주지를 않으셨다고...
사람좋으셨던 아버지께선 식사를 하시다가도 집 앞을 지나는 지인을 보게 되면 살림형편은 생각 안하시고
"님자! 밥이나 한술 같이 뜨고 가시지?" 라고 밥먹고 가기를 권하시곤 하셨다한다.
그렇게, 없는 살림에 어머니가 드실려고 두었던 밥을 지인에게 내어 드리고나면 어머니 드실 밥이 없고...
장날이면 특별한 볼 일이 없어도 장이 서는 이웃 마을에 가셔서 술을 좋아하시는 아버지께서 장이, 다 파하고도
밥집에 남아 지인들과 밤이 새도록 술자리 판을 벌이시곤 하여 산을 넘고 내를 건너 와야하는 먼거리를
소가 끄는 달구지를 끌고 밥집마다 기웃거리며 아버지 마중을 다녔다고 한다.
이때에만 해도 실제로 호랑이가 살아서 술을 잡숫고 오시다 중간에서 잠이라도 들면 그야말로 큰 화를 당하시기에...
근데,하도 아버지를 찾아 다니다 보니 아예, 소년 정학선이 밥집안으로 얼굴을 삐쭉이면 벌써, 알고 여긴 안계시다고
말해 줄 지경이였다고... 다행이 안에 계신 걸 확인하면 밖에 쭈구리고 앉아서 나오실때까지 무작정 기다렸다고한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술을 좋아 할 수가 없었다.
많은 젊은 사람들이 징용이나 징집으로 집을 떠나게 될때에도 ... 하나님을 안믿는 사람들은
이미, 죽으러 가는 것으로 단정하고 가는 날까지 술, 퍼먹고 싸움질에 남의 집 닭,잡아먹고 난동을 부리는데...
교회에 출석하는 이들은 이젠 더이상 집에 도움을 줄 수 없음에 떠나는 날까지도 열심히 일하는 모습에서
확연히 다름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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