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산 같은...내, 아버지

22 - 아버님과 성경책

chevy chevy 2010. 2. 15. 15:19

 

 

  1999년 봄, 정학선 장로님께서 미국에 오셔서 세째아들인 우리 집에 계시던 어느 주일날.

 교회에 가기위해.. 거실에서 TV를 보고계신 아버님의 면도를 해 드리고 성경책을 챙기는데..

 아무리 구석구석을 찾아도 찾을 수가 없었다.

 

이런 모습을 아버님께서 보시곤.. " 와 ~ 그러네..?" 하시고..

그래서 조심스럽게.. "성경책을 어디에 두었는지.. 안보이네요" 라고 말씀드리며

 

만화 책의  책장을 넘길때도 침을 묻히거나 함부로 하면 혼나는데..

세상에서 제일 귀하게 여기시는 성경책을 잃었으니..

이제.. 한말씀, 듣겠구나 생각을 했는데.. 전혀 예상외의 말씀을 하셨다. 

 

"그럼, 다른 성경책을 가지고 가자우~. 그리고, 성경책은.. 잃어버리면 찾는게 아니디~~

 그 성경 책을 주은 누군가가 읽어 볼 지도 모르잖가서..?  일부러 나눠주기도 하는데.. "

 

내가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아버님께선 오래 전부터 몇몇 뜻이 맞는 장로님, 목사님들과 기드온협회를 하신다는것을..

 

기드온 협회란..

숙박업소와 군부대, 교도소등에 무료로 성경책을 보급하는 일을 감당하는 모임이다.

 

하나의 에피소드이긴 하지만  짧은 순간의 생각과 행동이..

곧, 정학선 장로님의 하나님을 향한  생활이며 실천이셨다.

 

 매년, 봄즈음에 한번씩 미국을 다녀가셨지만

 2001년엔 넷째인 기복이와 함께 이곳에 오셨었다.

 

넷째는 동부에 있는 친구네 다녀와서는 일이 있어 혼자 먼저 귀국을 하고

나중에 아버님께서 귀국하실때, 세째 며느리, 내,아내가 동행하여 말동무를 해 드렸는데..

이것이 마지막 방문이 되었다.


  

2002년 서울에선 무슨일이 있었을까..?

지금 생각해도 어딘지를 모르겠는데.. 생긴지 얼마되지 않은 새 건물의 노인병원이였다.

<큰형의 설명: 분당의  보바스 병원>

 

내가 넷째에게서 연락을 받고 갔을땐  이미 의식이 없으셨다.

그리고, 3일후 심장마비.

 

의사샘은  전기충격기로 무장하고 거의 두시간을 이마에 땀까지 흘리고 있었다.

아무도 말을 안하고 있었지만..  내가 큰 형에게로 가서 입을 열었다.

 

" 큰 형!!  이제 그만 어머니한테 보내 드리지요."

2002 년 8 월 9 일.  그렇게 우리의 곁을 떠나셨다.

그 노인병원이 생기고 첫 번 사망, 사례라고도 하고.


"항상, 존댓말을 쓰시며 부탁하는것도 미안해 하셔서 우리가 더 미안했었는데..

 진짜, 신사 분이 돌아 가셨다" 며 아쉬워하는 간병인들의 수군거림도 들렸다.

 

근데, 거기엔 영안실이 없다.

남겨진 사람의 편의를 위한 것이라면  입원 환자를 위해서 없는 것이 맞을 것이다.

 

환자 모두가 노인 분들이신데.. 들어 올때 현관으로 왔어도

언제일지 모르지만 나갈땐 저 영안실을 통할지도.. 라고 생각하면 유쾌할 수가 없을 테고

우리 병원에서 나가실때는 제발로 걸어 나가실꺼라 영안실은 필요없다는 희망일테니..

 

목동의 이대병원 영안실로 모셨는데.. 가까이에 평광교회가 있었다.

노회장으로 장례를 하기로 했는데.. 장례날, 아침에 비가 그쳤다.

통일로에 있는 망향의 동산에 안장하고 오는 길에 다시, 내리던 비가.. 교회에 도착하니 또,그쳤다.

 

근데, 교회에 와서 알았다.

어머님,돌아 가셨을때는 성경책을 품에 넣어 드렸는데.. 아버님께는 미처 생각을 못했었다.

하지만, 상관없다 .

아버님의 생각이 성경책과 동일 하셨으니.. 구태어, 활자가 찍힌 종이 성경은 필요가 없을 것이다.

 

장례를 마치고  각자 자기 사는 곳으로 헤어지기 전날,   

다섯 형제가 강남의 집근처 냉면집에서 점심을 함께 했다.

 

이십 여년만에 처음.. 아버님장례를 이유로 아들, 오형제가 한 자리에 모였지만..

두 분, 부모님께서 이제는 다 돌아가셔서 언제 또, 다시 만날 수 있을지 기약할 수도 없다.

 

그러면, 유산얘기가 있어야 하는데.. 아무도 말이 없었다.

아버님의 것이니.. 당연, 아버님의 맘, 편하신대로지만

유산과 아버님중에서 하나을 선택하라면.. 난, 아버님의 셋째로 남고 싶다.

 

이후에도 들은게 없으니.. 알 수는 없고 

내,생각엔 남은 모든 재산은 원주인인 하나님께 되돌려 드렸으리라...

 

그렇게 헤어졌다. 그리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 왔다.

몇년이 지나 2005년 12월 1일, 장로님생전에 이사로 계셨던 무료 노인 요양시설인

경기도, 이천의 한나원, 경내에서 고 정학선 장로 공로비 제막식이 조촐하게 있었다. 

 

 PS:   2 의 숫자는.. 정학선 장로님과 참! 으로 많은 인연의 숫자입니다.

        생신이 22년 2월 22일, 돌아 가신 때는 2002 년,

        이 글도 부러 맞춘게 아닌데.. 22 번째네요

        근데.. 아버님의 생신이 사실은 1918 년인데 북에 계신 혈육에 피해가 있을까봐.. 고치신듯.

 

        내, 아버님 이야기를 마치며.. 그동안 읽어 주신것 감사드림니다.

       후기을 가까운 시일안에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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