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산 같은...내, 아버지

13- 비로소, 서울에 안착하다.

chevy chevy 2009. 5. 16. 10:37

 

 

  1955년 가을,

 

직장인, 조선 장유회사가 서울로 이전 하면서 함께 서울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경인국도가 막, 시작되는 서울의 서쪽, 끝자락.. 안양에서 맑은 물로 흘러 내려 온 도림천이

 

드디어, 양재동에서 한강물과 만나기 바로 전, 영등포,문래동에 공장터를 정했는데...

 

일제때, 식량과 군수물자를 일본으로 실어 나를 배가 닿을 수 있는 인천과 가까우면서

 

서울, 근교인 영등포에 일본인들이 세운 군수공장이 많이 있었던가 보다.

 

그 중, 군복 공장이였던듯한 공장에 거대한 장류 저장 탱크들을 설치한 조선장유가 자리 잡았다.

 

그리고, 그 옆 개천 건너편에 연립주택 스타일의 일자형 단층 주택들이 줄지어 있었다.

 

 

지금까지의 글은 부모님과 함께 살아 오는 동안 단편적이면서 귀로만 들었던... 

 

내가 태어나기 전에 있었던  일들과 기억엔 전혀  없는 아주 어렸을적 이야기였다면

 

이제부터는 세째아들인 나의 눈과 귀로 직접 보고 들었던  겪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 집은 왼편의 두번째 골목으로 들어가서 오른편으로 세번째 집이였던거 같은데...

 

어쨌거나, 앞집엔 성남이형네가 살았고 골목 입구집엔 광호형네가 살았었다.

 

두 집의 아버지가 나의 아버님과 같은 회사엘 다니셨다.

 

공장,앞엔 서울역까지 가는 뻐쓰종점이 있었으며..

 

좌측엔 허구한날 불이 나고 보일러가 터지는 동신화학 고무공장이 있었고

 

오른쪽으로  노루표 페인트회사가 있었다.

 

또한,  나의 어머니와 내,형제들이 다니던... 마당에 종탑이 있는 영문교회가 있었다.

 

내가 살다시피 놀러갔던 곳은 아버님께서 상무로 일하고 계시는 조선장유 공장이 였는데...

 

평일날, 공장에서 얼마든지 뵐 수 있었던 나의 아버님, 정학선 장로님을

 

공장이 쉬는 일요일만 되면 어디서건 뵐 수가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된거지만..

 

서울 남산중턱 후암동옆, 피난 내려 온 이북출신 사람들이 모여 이룬 해방촌에 이름,그대로

 

고향 사람들끼리 힘을 합하여 세운 평북교회에  아침에 가시면..  저녁 예배까지 드리고

 

어두운 밤이 되어서야 집으로 오시곤 하셨기 때문이였다.

 

 

58년 1월18일 이번에도 아들인 다섯째, 기석이가 태어났다.

 

 그리고, 59년, 내가 영등포 국민학교 1학년 입학하고 1학기를 채 마치기도 전인 

 

어느 날,  갑자기, 서울 중심부인 남산아래 후암동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이사하기전, 어머니께서 가족사진을 찍으러 사진관엘 가자고 하셨다.

 

내가 몇번을 아버님모시러 공장으로 갔다왔었는데도 불구하고..

 

결국,사진에는 아버님과 그때,신설동의 대광중학교에 진학한 첫째아들.

 

그리고 같이 가셨으면서.. 너희끼리나 찍으라며 어머니께서도 빠지셨다.

 

아내로써, 또한, 아이들의 엄마로써  남편에게 바라는게 사실은 대단한건 아닌데도

 

남편은 그런 걸 못챙겨줄때가 있는가보다..

 

그래서 이빨,빠진 그때 가족사진을 볼때면 아쉽기만 하다.

 

 

새롭게 둥지를 틀게 된 후암동은 문래동하고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유난히 후암동에는 적산가옥(일제때 일본인이 살다 패전으로 버리고 간 집)이 많았다.

 

광복후, 주인없는 집을  꿰차고 있다가.. 이번엔, 그가족들이 625전쟁통에 죽든가,

 

아님, 피난갔다가 늦게 왔는데.. 이미, 다른 사람이  먼저  살고 있으면.. 그사람이 장땡인거다.

 

 

우리는 59년도에 이사했으니... 당연히, 전주인에게 돈을 지불하고 구입했을것이다. 

 

꼭, 그런건 아니겠지만

 

여튼, 사회계층을 상,중,하로 쉽게 분류를 하자면.. 상위층 인사 가족들이 많이 살았던 거 같다.

 

물질적인 여유와 이름을 대면 금방 알,정도로  알려져 있는 사람들이 많이 사는 동네라  

 

그런거론 내세울것이 하나,없는 우리가 처음,얼마간은 참! 낯설어 했던것 같다.

 

그러나, 맹모삼천지교란 말이 있듯이 사람은 환경에 의해서 얼마든지 성격이나 인간성,

 

나아가 인생까지도 달라지는 것으로 미뤄 볼때.. 

 

어려서, 여러 계층의 사람들과의 삶을 경험한다는 건, 행운이였다.

 

문래동에 계속 살았다면 당연, 거긴 또, 그곳대로의 다른 인생이 있는 거 겠지만...

    

 

그런데.. 왜.. 후암동으로 이사했을까?

 

물어 보나 마나... 아버님께서 출석하시는, 하나님의 집인 교회와 가까이 있기 위해서 였다.

 

서울로 이사한지 4년만에 드디어, 우리 가족이 모두  평북교회라는 한교회를 섬길 수 있게 되었으며

 

나의 아버님께선 비로소, 삼일 저녁(일요일 이후, 세번째 날, 즉, 수요일) 예배에도 마음, 놓고

 

 참석하시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