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산 같은...내, 아버지

21 - 하나님의 마지막 사명

chevy chevy 2010. 1. 1. 04:33

 

  교인의 숫자는 계속 늘어나는데 반하여 교회를 확장할 주위공간은 없고

 후암동 종점, 좁은 지역에 이미, 많은 교회가 있어 전도의 사명을 감당하기위해

 보다 넓은 곳으로 이전하기를 기도로 구하는 가운데..

 

교회는.. 79년 3월 목동에 생산녹지 2,618평을 매입하였다.

그러나, 그후에 수립된 목동 신시가지 도시계획에 맞물려 서울시에 의해 대지수용을 당하게 되었다.

 

교회는 나름대로 여러 통로로 탄원과 시정을 요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강제나 다름없는

선택의 여지없이 넓은 교회부지를 헐값으로 (대략,2억7천만원) 서울시에 수용당한것이다.

꿈이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없어졌으니.. 교회와 교인들의 실망과 허탈함은 컸을 것이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예비하신뜻을 알 수 없고 또,교회 재정이나 입장도 어려운 시기였던  

85년 8월부터 평광교회 건축위원장직을 맡으신, 정학선장로님께서는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87년, 목동 도시계획에 의한 종교부지에 508평을 (2,618평 보상가의 두배가 넘는) 대략6억원에 구입하게 된다.

 

교회부지 문제를 매듭짓고 드디어 89년부터 새 성전건축 공사에 착수하게 되었다.

해방이후 월남하시어 지금까지 머무시는 곳마다 교회를 세우는 일에 힘, 보태기를 하셨지만

이번, 평광교회 이전 확장 공사야말로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일생의 마지막 사명으로 교회건축에 정성을 쏟으셨다.

 

불안정한 물가로 인해 건축자재값을 미리 선불함으로 건축자재를 확보할 수 있었으며

설계당시의 예산에 크게 차이없이 계획된 날에 성전을 완공하게 되었음은 앞을 내다보는

미래 지향적인 안목과 하나님의 사역엔 아낌이 없는 그의 충성스런 마음 가짐때문이 였을것이다.

78년, 성전 기성회를 조직한지 12 년동안의 우여곡절끝에 드디어 꿈을 이루었다.


그리고, 정학선장로님께선 평광교회가 목동으로 성전 이전 건축을 하는동안  

이제는 아무 연고가 없어진 후암동집을 떠나 신사동으로 거처를 옮기셨으며

하시던 사업을 접고 은퇴를 하셨다. 

 

아마, 88년, 서울 올림픽할때부터 세아들이 살고있는..

미국, 캘리포니아 L.A에 일년에 한번씩  다녀가시기 시작하셨던걸로 기억한다.

 

나의 아버님이신 정학선장로님께서 측량할 수 없을 만큼 크시다고 생각하게 된게..

아마, 이때쯤일것이다.

 

L A는 넓기도 하지만 대체로 차를 이용하기 때문에 걸어다니는 사람이 별로 없는데..

어쩌다, 걷게 되는 길거리에서도 마주치는 사람을 서로 알아보고 인사를 나누시곤해서..

아시는 분이세요? 하고 여쭤보면.. 

 

어~ 한국에서 모교회의 모모장로님. 하시곤 해서 내가 많이 놀랬다.

근데, 이런일이 한,두번이 아니였다.

때론, 내가 교회 결석한것까지도 한국에 앉아서 그날 바로 알고 계셨다.

 

이런 일도 있었다.

내가 출석하던 교회에 담임 목사님이 사임하셔서..  미,동부에서 목사님께서 새로 오셨다.

우리 집에서 교회까지 왕복,100마일(160킬로미터)거리로 멀기도 했지만

새벽 기도회엔 간 적도 없는데.. 첫날, 새벽 기도회를 마치고 새 목사님게서 날 찾으셨다고..

 

나중에.. 그 교회의 장로인 나의 큰 동서께서 의아해 하며 묻기에.. 나는 모르겠다고 대답했었는데..

대구,남성교회(전, 평북교회) 의 박토채장로님의 사위, 이하영목사님이셨다.

이민 전, 대구에 잠시 살았을 때.. 박장로님의 딸가족이 미국으로 이민간다고..

교회 예배중, 인사차 들렀을때, 잠깐 뵀었다.

 

그때, 먼발치에서 머리 꼭지만 봤을뿐, 피차간에 가까이에서 인사를 나눈적도 없어서

얼굴이며 이름도 몰랐으며.. 그리고, 잊고 있었는데, 

어떻게 그 교회로 오시게 되었는지..?

또, 내가 그 교회에 출석하는 걸 어찌 알아서..  생면부지의 나를, 찾았을까?

 

물론, 정학선 장로님의 아들이라는 것 때문이였겠지만..

비로소, 내가 지구상에서 까불고 뛰어봐야.. 아버님, 손바닥이란걸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