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산 같은...내, 아버지

16 - 장로님의 취미 생활

chevy chevy 2009. 9. 16. 07:09

 

나의 아버님, 정학선 장로님의 취미는 우표수집..? 그렇다.


대개의 우표 수집하는 방식대로  이미, 사용했던 우표들이 주류였지만..

일부러 같은 우표가 여러개 인쇄되어 있는 커다란 전지를 사서 보관을 하시곤 하셨다. 

 

우리가 어렸을 적에 너희, 다섯 형제들이 크면 나눠 주실꺼라고 하신걸로 보면..

예로부터, 딸을 낳으면... 그 딸이 자라서 시집갈때 장농을 만들  오동나무를 마당에 심듯이.. 

그러나, 아버님께선 공산당이 싫어 출애굽하듯, 고향을 떠났으나

 

아직, 고향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남한에서 유랑생활을 하니  무엇이라도 심을 땅이 없기에

이를 대신하여  아버님의 조그마한 소망을 담은 의미있는 선물로 주시려던 것이 뻔한데..

아버님 돌아가시고 나서.. 우표의 행방을 모르겠다.

 

 

그리고, 장충 체육관엘 직접 가셔서 농구랑 배구 관람을 좋아라하셨다.

항상, 혼자 가시는듯 하셨는데... 집에 계실때도 중계가 있을땐 

쓸데없이 샀다고 핀잔하셨던 그 당시 신식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독차지하고 들으셨다.

 

 

그리고,또 하나.

작은 키, 중절모자에 어두운 계통의 옷을 입고 한손엔 지금의 랩탑가방같은 것을 든 사람이

"채권이나 머리카락 삽니다" 를 외치며 골목 골목을 다니던 시절.

 

집에는 5년과 10년짜리 국,공채들이 있었다.

집에 그런 것들이 왜?  있었는지 짐작도 못하지만 

사고 팔고 하는 걸 본 적이 없고 그냥, 처 박혀있는 것을 보기만 했다.

 

그런데, 이렇게 돈이 되고... 돈을 모은 것은

내,아버님의 취미라기보다는 어쩌면, 하나님의 취미인듯 싶다.

 

하나님의 사람, 정학선 장로님을 통하여 교회와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쓸 수 있도록..

얼마든지  퍼내고 또, 퍼내도 마르지 않는 샘물이 였으니..

 

 

다른 취미도 있었는데.. 그건.. 낚시 다니시는 거 였다.

일요일만큼은 교회에 가시느라 절대 안가셨지만 주중에 있는 공휴일에는

새벽에 가셨다가 밤늦게 오시던가.. 아니면, 밤낚시를 하시고 다음날 저녁에 오시던가 하셨다.

 

낚시를 가시면 물가에 자리를 잡기 전에

먼저,  그 근처의 집에(식당,말고)  점심식사를 부탁하시곤 하셨다.

 

주로, 신갈이나 고삼 저수지등 서울 근교의 저수지를 다니셨는데..

때론, 처남이 계시는 안면도에도 다녀 오셨다.

 

낚시에 정신 팔려있다가 시골집에서 만들어 내오는 점심식사가 고봉으로 담은 보리밥과

시금치 된장국에 나물 반찬이였지만 얼마나 맛이 있었던지..

아마도, 갈 수 없는 이북 고향, 어머니의 손 맛이 그리우셨던게 아닐지..?

 

때로, 집으로 오시는 길에 늦은 시간이 되어서도 대야에 담겨져있는 채소따위를 다 팔지못해서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노점 아주머니를 발견하시게 되면 같이 갔던 사람들을 불러모아

결국에 다 팔아드리곤 하셨다. 

 

 

90년대에 월간 낚시라는 잡지사에서 미국 방문길에 오리건주, 태평양연안에서 낚시하신

경험을 써 달라는 부탁으로 원고를 기고하신 적도 있으셨다.

 

 

76년부터 둘째 아들이 미국에 살기 시작하고.. 77년, 아내, 이성옥여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후,

낙심해 하실 아버님을 위로하려는 마음으로 둘째가 초청하여 1~2번 미국을 방문하셨었다.

 

세째인 내가 미국으로 이민 온 86년 이후엔 막내까지 세 아들이 있는 L.A 엘 매년 방문하셨었는데..

이 곳에 오시면 아들네 가족들과 친구분들을 한번씩은 만나는 두 주일쯤지나서

꼭~~들르시는 곳이 오리건주, 포틀랜드에 살고 계시는 김상증 목사님댁이였다.

 

그곳에 가시면 두 분께서  주로,태평양 연안으로 낚시를 다니셨는데..

아예, 낚시장비도 목사님댁에서 100 마일이상 떨어진 바닷가 근처의 집에 맡겨놓으신다고

 

90년대 말이였던가?

그 곳에서 낚시를 마치고  같은 오리건주,포틀랜드의 은퇴하신 목사님댁으로 향하시던중..

운전하시던 목사님께서 깜빡 졸으셨던지.. 그만 차가 계곡아래로 추락하는 사고를 당하셨다.

 

단단하고 커다란 미제차였기에 다행히 크게 다친 분은 없었지만

운전석 옆자리에 계셨던

나의 아버님만 앰블런스로 후송되어 병원에 입원하여 계시다가 귀국하셨는데..

이것이 마지막 낚시 여행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