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산 같은...내, 아버지

12-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우다.

chevy chevy 2009. 4. 8. 03:32

 

 오라는 곳은 없어도 정처없이 피난을 하다보니 부산까지 오게 되었지만

 

여기에서도 하나님을 섬기는 일, 또한,  절대로 소홀히 해서는 안 될 일이였다.

 

52년 1월, 부산, 용두산 자락에 노의선 목사님, 이성호전도사님,등과 철산교회

 

(현,산성교회)를 세우는데 열심으로 도왔음은 물론이였다.

 

각지에서 몰려드는 피난민중에는 북쪽에 고향을 두고 월남한 다수의 이북출신들이 있었는데...

 

새로운 정착지에서 말의 억양이 낯선 토착민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교회를 세우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개의 경우 자신, 스스로가 실향의 고통과 아픔을 신앙으로 달래고자...

 

또, 같은 어려움을 당하여 방황하는 피난민들에게 등대의 역할을 하고자 하는 이심전심의

 

마음이 크게 작용하여 고향에 두고 온 교회를 재건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 결과, 한국 전쟁발발 50주년이 되는.. 2000년대 초에 접어 들면서

 

창립 50주년을 맞는 교회가 부산 지역에서 유난히 많았다.

 

 

아내, 이성옥은 집안 형편을 조금이나마 도울 생각에 남편,정학선이 근무하는 조선장유에서

 

생산되는 장류를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는 길거리에서 팔기로 하고 실행에 옮겼으나 

 

항상, 사면서 들어간 밑천 보다 팔아서 생긴 돈이 적었다.

 

문학 소녀처럼 감성이 순수하여 어려운 사람에게 동정심이  유난히 많았던 탓도 있었지만

 

애초부터 장사수완이란 없었으므로 이내 그만 두었다.

 

 

같은 해, 6월이 되자 이번에도 아들인.. 이 글을 쓰고 있는 세째, 기준이가 부산 영도에서 태어 났다.

 

서울이 두번째로 수복된지 벌써 2년이 지났지만.. 

 

첫번 수복되었을 때 섣불리 국군 따라 올라 갔다가 1.4후퇴때 많은 피해를 입은 걸 알기에...

 

성급하게 서두르지 않고 ..

 

53년 7월,휴전협정이 맺어지고 포성이 멈춘 후, 조금이라도 북쪽, 고향과 가까운 대구로 이사하였다.

 

대구에서도 교회 설립에 관여하였는데 대구,평북교회(현, 남성교회)를 설립함에 있어

 

대명동의 임야를 구입하여 교회부지로 헌납하였다. 

 

625직전, 의정부 교회에서 초대 장로에 선출되었으나 보름후, 전쟁이 나며 장립을 못받은 적이 있었다.

 

4년후인 54년 7월16일, 대구, 평북 교회에서 장로에 선출되어 장립을 받았는데... 정학선의 나이 32세였다.


 <앞줄 가운데  아이(둘째?세째?)를 앞 세우신 분이 고 정학선장로님, 그 옆의 짙은 색 치마를 입으신 분이 부인, 고 이성옥여사

그리고,반대쪽으로 이성호목사님(현재,미국 LA에 생존해 계시며  저희 사돈 되십니다), 고 길의수 장로님,

둘째줄 오른쪽에서 3번, 고 노이각장로님, 1번, 동생인 고 정학건장로님, 뒤로 담에 팔을 걸치신분이 고 한영제장로님>

 

그리고, 그 해에 이번에도 아들인 넷째, 기복이가 태어났다.

 

 

교회근처, 피난민들이 살던 천막촌에서 불이나 여러 채의 천막이 타고 약간의 이재민이 발생하였다.

 

평북 교회에 출석하는 할아버지 한분이 실수로 촛불을 켜 놓고 잠을 자는 바람에 불이 난것이라고..

 

연로하신 할아버지께서 가족들은 물론이고 주위의 사람들한테도 핀잔을 많이 듣게 되었다.

 

주일 예배후, 쌀 2가마를 모아서 전달하기로 정하고 각자 낼 수 있는 양을 구두로 표하기로 했는데...

 

정학선장로님께서 쌀1가마를 헌금하겠다고 먼저 말씀하시자... 그게 기준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모은 쌀이 목표인 2가마를  훨씬 넘는.. 무려 10가마가 되어 

 

교회를 안 다니지만 이번 화제로 피해를 입은 주위 사람들에게도 쌀, 한가마씩을  나누어 줄 수 있어서

 

그나마 할아버지의 체면을 조금이라도 살릴 수 있었다고 한다.

 

 

55년, 정학선 장로님은 앞으로 보다 적극적인 기독교의 확장을 위해 문서 선교가 필수적이란 생각으로

 

당시 대구,평북교회  담임 목사님이셨던 이성호목사님과 정영록집사님, 한영제집사님과 함께

 

문서 선교를 위한 기독교 전문 서점인 정문사를 개설하였는데...

 

오늘 날, 각종 기독교 전문 서적을 만들어 보급하는 한국 최고,최대인.. 기독교문사의 시초가 되었다. 

 

그리고 대구,평북교회는 세월이 흐르면서 이름도 남성교회로 바꾸고 

 

이제는 대구, 중심부가 된 대명동에서 1981년 넓은 평리동으로 이사하여 더욱 크게 성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