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산 같은...내, 아버지

10- 재회, 그리고 또, 다른 떠남

chevy chevy 2009. 3. 17. 09:47

 

 낯선 가명으로 발신되어 있었지만  남편으로부터 오라는 반가운 편지를 받은 부인, 이성옥은...

 

망설일 것도 없이 곧, 채비를 서둘러 아직은 하나뿐이고 젖먹이인 아들, 기현을 등에 업고

 

보장된것도, 가 본 적도  없지만, 그리운  남편이 살고 있는 남쪽, 미지의 세상을 향하여

 

기차를 타고 집을 떠났다.

 

언제 다시 돌아 올 수 있을 지는 모르겠지만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할꺼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이때는 이미, 삼팔선에서 기차의 통행도 끊겼고 사람의 통행을 자유롭게 할 수 없게 막았기에

 

가능한 다른 통로를 이용해야 했다.

 

다행히, 젖먹이 아이를 등에 업은 아낙을 수상하게 보는 시선은 주위에 없었다.

 

천으로 된 기저귀를 흐르는 물가에서 세탁하여 들판에 널어 말리는 아낙을 누가 의심하겠는가?

 

하나님의 도우심은 여기에서 그치지않고  남쪽이 점점 가까워지며  검문소에서 검문이 심해지는데

 

어디로 가는 것인지? 묻는 질문에 얼떨결에 고향에 있는 OO마을에 친청집이 있다고 대답을 했다고...

 

그런데, 그런 똑 같은 이름의 동네가 검문소 아랫 마을에  실제로 있었다고...한다.

 

그래서 경비군인들은 근처 마을 사람으로 생각을 하고 무사히 보내 주었다고...

 

 

그 당시 남쪽에서는 같은 민족이라 생각해서 이북에 대하여 적대적은 아니였기에 삼팔선의 경비가

 

허술하였지만  공산당이 들어선 북쪽에서는 공산당을 반대하여 월남하는 사람이 늘어 남에 따라 

 

통제가 엄하여 북쪽에서  발급하는 통행증이 없이는 남쪽으로 갈 수가 없었기에...

 

월남,할 사람이  운이 좋아서 삼팔선 근처까지 오게 되면 마지막으로 ...

 

목숨을 걸고 남과 북을 넘어 다니며 비밀스럽게 보따리 장사를 하는 안내인을 소개받아

 

돈을 주고 어두운 밤에 그들만 알고있는 길을 이용하여 남쪽으로 내려 오게 되는데... 

 

목숨이 걸린 일이라 이미, 돈을 다 건네받은 안내인은 의뢰인을 남쪽으로 가는 길 중간에

 

내 팽개치고 혼자 도망가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사람, 정학선이 편지로 알려 준 현지에 살고 있는 사람을 통하여 신뢰할 안내인을

 

소개받아 돈의 절반만 주고 물을 건너고 산을 넘어 안전하게 남쪽에 발을 딛고서 안내인에게 표식을

 

건네주면... 안내인은 되돌아가서 이것을 보이고 나머지의 돈을 받는 것이다.

 

숨,죽이고 몰래 가는 밤길에 아이 울음소리가 나서 삼팔선을 지키는 북쪽 경비병에게 발각될까 겁먹고

 

아이의 입을 틀어 막다보면 어느 새, 아이는 숨을 못쉬고 죽어 있는 경우도 있고

 

내가 살기 위해서 최악의 경우 비정하게 아이를 버릴 수 밖에 없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믐이라 달빛도 어두운데... 아무것도 모르는 젖먹이 아들,기현은 전혀, 울지도 보채지도  않았다.

 

이 또한, 하나님의 도우심이 였으리라.

 

그렇게, 무사히 의정부에 도착하며 

 

고향에서 한시도 걱정을 내려 놓지 못했던 하나님의 사람, 남편,정학선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앞으론,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헤어지지 않으리라 마음속으로 다짐도 하였다.

 

신탁통치문제로 사회는 계속 혼란스러웠지만 큰 일없이 시간이 흘렀다.

 

1948년 8월이 되자 또, 한번의 경사가 생겼는데  둘째 아들인, 기인이 태어났다.

 

이어 교회도 양적으로 부흥하여 더 넓은 교회당이 필요하여 건축을 하게 되자

 

나름 경제적으로 큰 힘을 보탤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람, 정학선을 그렇게 준비 하신 듯 하다.

 

해가 바뀌어  다음해인 1949년이 되자 일제 시절 만주, 봉천(현재, 심양)에서 살때 그 곳 서탑교회를 함께 섬겼던

 

김광훈 집사님(후에, 목사님이 되시다)이 결혼을 하여 의정부 농업학교에 화학선생님으로 오시며

 

이번엔, 해방된 조국에서 더욱 아름다운 모습으로 주님의 몸인 교회를 함께 섬기게 되었다.

 

그리고, 1950년 6월 첫째주, 제직선거에서 28살의 나이로 초대장로에 선출되었으나

 

6월 25일 주일 날 아침, 갑작스레  터진 625사변으로 장립은 하지 못하고  피난 길에 나서게 되었다.

 

예배를 드리다 가깝게 들리는 포성에 놀라 뛰쳐 나오니 벌써 많은 피난민들이 남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간단하게 짐을 꾸려서 사람들이 많은 찻길을 피하여 도봉산 기슭으로 해서 얼마 전부터 회현동에 살고

 

있는 사촌누이의 집으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