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산 같은...내, 아버지

5 - 고향을 떠나 미지의 세상으로

chevy chevy 2009. 2. 3. 08:57

 

 고향에서 보통학교(중학교)를 마치고  농사 일을 돕고 있던중에...

 

일본말 잘 하고 또한, 글,잘~쓰고 리더쉽이 있으며 두뇌가 명석한 동생의 재능을 익히 잘 아는

 

먼저, 만주, 봉천에 가서 살고 계시던 바로 위의 첫째되시는 형으로 부터 편지가 왔다.

 

일자리를 구할 수 있고 공부를 더 할 수도 있으니... 형님네가 살고 있는 만주, 봉천으로 오라는...

 

그 당시에는 중국과 조선이 일본의 지배하에 있었으니... 압록강을 건너는 게

 

국경을 넘는 개념이 아니라  용산에서 한강철교를 건너 반대쪽인 노량진으로 가는 격이였다.

 

형에게서 받은 편지 한통을  가슴에 품고 기차를 타고 봉천역에 내렸는데...

 

이때가 1938년 17세가 되던 해였다.

 

결혼하여 살고 있던 형님댁에서 기거를 하며 낯선 타지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곳에 서탑교회를  출석하며 주일학교의 서기로 봉사를 하기도 하였다.

 

1940년 봉천 상공학교를 졸업하며 일본인이 경영하던 쌀 배급회사에 취직을 하게 되었다.

 

돈이 있다고 마음대로 쌀을 사던가, 파는 것이 아니라 관청에서 가족수에 맞게 쌀 배급표를

 

발급받아서 거기에 해당하는 양 만큼의 쌀을 살 수 있는 것이였다.

 

당연히, 이것은 일본이 식민지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한 하나의 강제적인 방편인데...

 

일본의 민간에서 회사를 설립하여 이 일을 대신하고 있었다.

 

이제, 청년으로 장성한 정학선은

 

그 민간에서 하는 쌀 배급회사에 취직을 하여 경리일을 맡아보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날씨가 더운  한여름에 갑자기 으실으실 한기를 느끼며 앓아눕게 되었는데...

 

심하면 죽기까지하는 법정 전염병인 장질부사에 걸렸다.

 

회사에 출근도 못하면서 치료를 하느라 그 동안 벌어서 형님한테 맡겨 놓았던 돈을 다 쓰고도

 

별차도는 없고  이제 겨울이 되어 할 수 없이 고향, 평북, 철산으로 오게 되었다.

 

금의 환향이 아니라 아픈 몸을 이끌고 빈털털이로 고향 역에 내려서 역사를 빠져 나오니...

 

동생이 달구지를 끌고  마중을 나왔는데... 추운 겨울임에도 얇은 모시 여름옷을 입고 있었다.

 

그때 의료수준으로는 살기가 쉽지 않은 법정 전염병인 장질부사였지만 다행히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봄이 다 가기전에 나아서 다시 만주, 봉천으로 갈 수 있게 되었다.

 

근검 절약하며 모아 놓았던 약간의 돈은

 

8~9개월을 앓아 누워 있으면서 다 까먹고 목,뒤로 움푹 패인 흔적만 병을 이겨 낸 훈장처럼 남았다.

 

워낙, 성실하고 정직하였으므로 다시, 쌀 배급회사에서의 생활은 계속되었다.

 

하루는 은행에서 회사,돈을 찾아 왔는데...  아무리, 다시 세어봐도 남기에...

 

퇴근하여 은행엘 가니 계수가 맞지 않아서 퇴근을 못하고 있었다고

 

경위를 설명하고 돈을 돌려주니 고마워하며 수치가 정확하게 맞았다고 했다.

 

맡은 바 일을 성실하게 잘 하니 그 성실함이 소문이 나서 다른 쌀 배급회사에서 보수를 더 주겠노라며

 

옮겨 오기를 청하기도 했지만...

 

태평양 전쟁에 하나 있던 아들을 잃은 일본인 노인네가 사장인 회사에 남아서 일을 성실하게 했다.

 

 

어느 날 형수님께서 " 적은 이! (평안도 사투리로 작은 사람. 즉,  동생)  이제 장가를 가야하지 안같습네까?"해서

 

"아주마니 좋을대로 하시라요"라고  선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선을 보고 와서 며칠이 지나도록 가타부타 아무런 얘기가 없으니... 형수님께서 답답하고 궁금하신 마음에

 

"좋다 싫다를 이야기해야 색시가 마음을 정할텐데... 아무 말이 없으면  어케 하라는 겁네까?"

 

"글쎄, 전, 괜찮은데... 아주마니께서 뭐~ 알아서 하시라요" 해서  결혼을 하게 되었다.

 

같은 서탑교회를 출석하는 미인에 속하는 얼굴 생김새에 영화보기를 엄청 좋아라해서

 

일본과 서양 영화배우들 이름을 줄줄이 꿰고 있었다.

 

그리고, 같은 교회에... 나중에 한양대학에서 음대 학장지내신 오현명씨가 출석했던 탓이였던지

 

나중에 부부싸움때 마다 듣는 이름석자가 되기도 했지만

 

음악, 또한 좋아한 걸로 치면 문학 소녀였음에 틀림없었다.

 

그리고, 일본어를 잘하여 전화국에서 교환원으로 그시절, 첨단 전문직 직업도 가지고 있었고...

 

지금에 와서 확인할 순 없지만  현실과 다소,동떨어진 문학 소녀였다는걸 생각하면

 

그당시 먹고 사는 일에 신경, 안쓸정도 되는 집안의 딸이였을것 같다.

 

어쨌든, 이렇게 해서... 1944년 10월 15일, 나의 아버님과 어머니께서 결혼을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