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나의 이야기 ~~ 열 여덟번째

chevy chevy 2008. 6. 17. 03:58

 

 

전기설비회사는 너무 멀리 다니기가 힘들어 결국 그만두고...

 

베니스 비치에서 셔츠장사를 하고 있는  손위 막내처남네 가게에 구경갔다.

 

역시 바닷가는 공기의 색갈이 파아란듯 눈시리게 파란하늘과 비릿한 바닷내음이 있어 좋다.

 

관광의 명소답게 눈을 즐겁게 해주는 별 난 사람들도 있고... 여튼, 구경꺼리가 너무 많다.

 

그런데, 벌써... 여름이 지나  날씨가 서늘해지니 방문객들이 많이 줄었다고...걱정이란다.

 

사시사철 장사할 수 있는 다른 장소를 물색중인데 장사 할 생각있으면 같이 알아 보자고...

 

그렇게  찾아 다니다가 12월초에 오픈 예정으로 준비중이라는 신문광고를 보고

 

LA에서 북서쪽으로 101번 후리웨이 타고 한시간 반 거리인 벤추라카운티의 옥스날드로 갔다.

 

극장 자리였는데..역사가 짧은 나라이기 때문인지? 오래 된 건물은 Antique(유서깊은)건물로

 

지정되어 건물 안쪽은 Remodel 할 수 있지만 바깥쪽은 절대로 건들 수 없다.

 

그런 극장건물을 그 동네에서 멕시칸 상대 마켓하는 한국사람이 사서 스와밋을 꾸미고 있었다.

 

이때(86년 말경), 스와밋이 한창 인기좋을 때였는데 렌트비가 스퀘어 피트당 2불이라는데 ...

 

난, 뭐 시세도 모르겠고 처남이 하기로 결정을 하길래  나도 하나 계약을 했다.

 

나중에 알기론...

 

스쿼어 피트당 2불은 비싼 편이라 그 동네 사람은 계약한 사람이 없고 전부 외지 사람들이였다.

 

시 청사(city hall) 근처 였지만 old town 이라  후줄그레하고 주민들 대부분이 가난한 멕시칸이였다.

 

어쨌던 멕시칸은 가족수가 많으므로 인구숫자만 많으면 괜찮을 것으로 기대를 했다.

 

그래서 아이템을 아동복으로 정하고 거기에 마춰서 준비를 했다.

 

옷걸이도 나무결을 살려 포근한 느낌이 들게 직접 만들고...시청에 가서 business-permit도 받고

 

드디어 문을 열었다. 

 

 그런데...

 

아이들 만큼은 좋은 옷을 입히려는 한국사람의 사고방식과 너무 달랐다.

 

얘들한테 도대체가  관심이 없다.

 

거의, 대부분이 구교 (가톨릭)을  믿는 종교탓인지는 모르겠는데...

 

먹을 것, 입을 것등...자기한테 필요한것은 자기복으로 타고 태어 난다고 믿는 모양이다.

 

아이들을 되는대로  입혔다.  큰놈이 입던거 작은놈 입히는걸 뭐라하는게 아니라

 

엄마,아빠는 그런대로  차려 입는데...그 많은 자녀들은 어울리지 않게 완전 거지꼴이다. 

 

물론 더러운 바닥을 아랑곳 하지않고 뒹구는 탓도 있지만 전혀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다.

 

어쩐지 근처에 중고품 파는 상점 (Thrifty store)이  여럿 있다는 것도 여기와서  알았다.

 

거기엔 누군가 신었던 양말을 포함하여 심지어 입었던 속옷도 판다.

 

이러니 장사가 될리가 없었다.

 

나중에 추가로 여자 옷가게를 인수해서 하기는 했는데...유행이 너무 느려서 손님들이

 

찾기 시작할 때쯤에는 이미 LA 자바시장에선 끝물, 한참 지난 후라 추가물건을 구할 수 없어

 

연결이 끊어지곤 했다.

 

장사도 돈이 바위돌 만한 크기로 굴러 다니는 곳에서 해야  눈에 보이는게 있지...

 

조약돌 만한데서는  그나마 벌어 봐야 손가락 사이로 모래알 빠지듯 비용쓰고 나면  남는게 없다.

 

이곳  옥스날드 스와밋에서 장사하는 한국사람들이 대부분 밸리, 내가 사는 아파트근처로 모여

 

살게 되면서 차 한대로 카풀해서 다니기도 했다.

 

LA에서 101번 후리웨이를 타고 북쪽으로 가다 우리가 살고 있는...Winnetca불러버드를

 

지나쳐서 더 북쪽, 가게가 있는 옥스날드로 가다보면...

 

언뜻 주위에 다른 차는 안보이고  나혼자만  있다는 걸 느낀다.

 

그래서 금방 눈에 띄어 과속으로 교통위반 티켓을 받을까봐 못달렸다.

 

그 길을 지금은 넓혔음에도 차에 막혀서 못달린다.

 


89년 가을에 막내동생의 처남과 내가 돈을 합쳐 카말리요 에 집을 사고 이사를 했다.

 

밸리에선 엘레멘터리 스쿨이 5학년까지라 큰아이가 졸업을 한 탓에 공백을 없애고자

 

카말리요, 우리가 살 집 한 불럭아래 살고 있는 아는 사람네 집에 큰 아이와 작은 아이를 

 

일주일 먼저  살게하면서..

 

바로,  6학년과 4학년으로  편입을 했다

       

      (집, 보러 다니고 계약하고는 내동생하고 집사람에게 맡겼다. 
      한국에 거주할때도 집문제는 항상 집사람에게 맡기곤 했는데.
      절대로 대범한게 아니고 ... 관심이 없다.)

 
에스크로 끝나고 열쇠를 받은후,

 

이사하기 며칠전에 아내하고 둘이서 청소할겸 구경삼아...비워져 있는 그 집엘 처음으로 가 보았다.

 

밤에 전등불 빛에 본 넓은 뒷마당이 나무로 울창해 보이기에 숲 넘어로 끝없이 넓을 껄로 상상하기도...

 

이사후 뒷마당에 나가 보니 수양버들 처럼 줄기가 길게 늘어진 나무들 뒤로 빛바랜 나무 담장이 있었다.

 

 

 시청에 수도 신청을 하고 집으로 오는 길에 태권도 싸인을 본 기억이 떠올라 애들 엄마와

 

함께 찾아 갔다. 도장 사무실에 들어가니 사범을 어디서 본 듯도 하고...상담을 하다가

 

한쪽 벽에 걸려 있는 여러개의 액자중에 수료증인지? 감사증서인가를 봤는데...

 

거기에 서울 삼영 국민학교라 써 있는게 눈에 띠었다.

 

거길 졸업했단다.

 

나도 그 학교출신이라고 하니  놀라는듯 금방 반가워하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러고 보니 나하고  사범 그리고 내아내까지 우린 초등학교 동문이네.ㅋㅋㅋ

 

어쩐지 본듯 하더만...내, 한참 후배 였다.  마음이 편해지는지...잠시 자기 고생한 얘기도 들려줬다.

 

오래전부터 내 아이들에게 무술 한가지는 꼭 배워주고 싶었다. 특히, 낯선 이곳 미국에선 더 강렬했다.

 

자기를 지킬건 자신밖에는 없다.  어느 세월에 누구를 부르고... 날샌 얘기다.

 

내가 라이드, 픽업 다 해주기로 하고 등록을 했다.

 

다행히 아이들도 열심히 했다. 수련생들이 상당히 많았는데 한국사람은 내 아이 두 명뿐이고 

 

다른 두 곳에도 도장이 더 있다고하니...이곳 백인사회에 뿌리를 잘 내린듯 하다.

 

당연히 내 아이들 학교에는  태권도 배우는게 소문이 나고 ...덤으로 도장 친구들도 생겼다.

 

시비거는 애가 없으니 별 문제가 없었다.

 

세월이 조금 흘러,

 

큰 애가 고등학교다닐때 하는 말이 어떤 흑인아이가 자꾸 시비를 건다는 거다.

 

백인동네라 흑인을 한번도 본 적이 없었는데... 아마, 새로 이사온 모양이다.

 

그렇다고 내가 가서 패줄 수도 없고...

 

"우선, 네 선생님한테 먼저 흑인아이가 시비거는 얘기를 하고 세 번까지만 참겠다고 해라.

 

네 번째는 참지말고 네가 하고 싶은대로 하고.. 그 다음은  아빠가 책임질께. "

 

결국 일은 터졌다.

 

학교 파하고 교문을 나서는 큰 애한테 시비를 걸었나보다...네 번째로

 

많은 학생들과 자기 아이를 픽업하러 온 어른들이 보고 있는 교문 앞에서

 

그 아이를 한 방에 제압했다.

 

순식간의 일이였다고...

 

나중에 듣기로 그아이의 집에선...


갈비뼈에 금이 갔다고 진단서 첨부해서 내아이를 고소하겠다고... 미친


이소문을 듣고 그때 그자리에서 싸우는걸 본 백인 학부형이 그 아이네 집에 함께 가서

 

witness(증언) 하여  결국, 그 아이만 자기 부모한테 혼나고...  끝났다.

 

그 이후로 학교에서 더 이상 그아이를 못보았다고도 했다.

 

작은 아이의 불만은 자기의 이름을 알고 있음에도  형의 동생으로 불린다 는거다.

 

선생님이건 학생이건 간에...

 

어쨋던, 태권도  검정 이단인 형, 덕분에 검정 초단인 동생도 학창시절을 잘 보냈을 터였다.

 

앞으로, 더 배우고 말고는 본인에게 달렸지만 살아 가면서 자신감으로... 함께 할 것이다. 

 

실생활에서 때론 법보다 주먹이 우선하기도 하니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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