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 열 두번째
대구에 가면...대구, 평북 교회근처에서 살았으면 좋겠다는 아버님의 말씀에
따라 교회를 수소문 했는데...오래 전에 이사갔다는 말밖에는 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알아 낸 곳이 남성교회였는데 ... 처음부터 남성교회로 가라 그러셨으면
될 것을 왜? 평북교회로 가라 그러셨는지 모르겠다.
625 바로 전에 의정부에 있는...이름은 생각이 안나는데..
의정부 제일 장로교횐가? 하여튼, 그 교회에서 장로에 피택되셨다가 625동란으로
장립을 못하시고 대구, 남성교회에서 장로 장립하신 것을 낡은 앨범에 꽂혀있던
사진으로 봐서 알던터라...
피난 시절때는 너무 어려 아예, 기억도 없고 성장한후 사진으로만 봐 왔던 그 곳을
2세대인 나의 형제 중에선 내가 처음으로 내가족을 데리고 방문하니
감회가 남다르다고 할까? 하여튼, 그런데 우리를 반겨 주시는 분들이 많이 계셨다.
서문시장 근처에서 기독교문사을 하시는 노이각 장노님내외분, 그리고 숭실대학의
이사장님이셨던 박괄채 장노님의 동생이신 박토채 장노님내외분,
김영국 집사님내외분등 특히, 담임목사이신 김진수 목사님은 예전에 서울에서
우리가 다니던 교회에서 부흥회하는 동안 후암동, 나의 아버님집에서 침식을 하신
적이 있었는데 .. 그때, 내 아내가 살림하던 때라 금방 알아 보시고는 반가워 하셨다.
어느 주일 날 예배를 마치고 노이각 장노님과 단둘이 걸어서 시내쪽으로 내려
오다가 장노님께서 어느 집을 가리키시더니..
"저 집이 피난시절 너의 가족이 살던 집인데...철대문만 바뀌었고 옛날,그대로" 라고
알려 주셨다.
잠시, 그자리에 멈춰 서서 열려있는 대문 사이로 안을 보니 조그마한 마당에 수도가가
보였는데... 엄마가 거기에서 빨래라도 하고 계신 듯한 착각에 빠졌다.
이 남성교회가 625피난 시절에 세워 졌는데... 그땐, 밭이였던 땅을
나의 아버님께서 구입하여 헌금하신 것 이라는 설명도 들었다.
그 피난시절, 무슨 돈이 있었을까?마는.. 아버님께서 31~ 32살정도의 나이셨는데...
내,나이가 29~30살이 였던 걸로 비교해 보면...
비슷한 나이대에 그 곳에 살았지만 난, 참 한심했다.
아버님께 감히 날 들어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틀려 먹은 것이긴 하지만...
4년 반만에 우리가 대구를 떠나 서울로 돌아 갈 때 쯤해서 외곽인 평리동으로
교회를 이사하기로 결정되어 건축헌금을 했는데...이번엔 김 영국 집사님께서
평리동,땅을 헌금하고 남성동의 교회,터를 판 돈으로 건축을 한다고... 근데...
난, 겨우 한달치 봉급밖에는 못했다.
서울, 정부 종합청사에 있는 보건 사회부에서 이주 사유서를 써서 보내라고 연락이왔다.
그래서, 생각끝에 먹고 살기도 힘들고 미국에 이미 살고 계신 처형께서 와서 사는게
어떻겠느냐? 해서 이주신청을 하게 되었노라 그런 요지의 편지를 보냈다.
얼마 후에 회신이 왔는데... 직접, 사무실로 출두하라고...
서울에 올라 왔으니 먼저 아버님을 찾아 뵙고 인사를 드리고 정부 종합청사로 갔다.
담당자가 컴퓨터 프린트용지를 철한 묶음을 보여주며
"당신,아버님이 고액납세자 500인 안에 속하는데...당신이 먹고 살기 힘들다는 게 말이 되느냐? "고
따지듯이 나에게 물었다.
"우리 아버님께서 그렇게 부자세요? 뭐, 가난뱅이가 아니란 건 알고 있었지만...부자라는 건
지금, 처음 알았읍니다. 그럼,얘기,좀 해주시죠. 세째 아들한테 돈 좀 주시라고...
그리고, 돈 있으면 그건, 아버님돈이지 내돈은 아니지요."
담당자도 할 말이 없는지..
하여튼, 거짓이라도 좋으니 이해가 되도록 다시 써서 보내라고 하여 사무실을 나왔다.
대구집으로 갈 요량으로 다시 아버님 사무실에 인사차 들르니 어찌되었는지? 물으셨다.
"거짓말이라도 좋으니 좀 그럴듯하게 다시 쓰라네요."
"거!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쓰라. 그래서 못가면 내가 밥은 먹여 주가서."
다시, 써서 보냈다. 당연히, 처음 것과 똑 같을 수 밖에... 그게 사실이 였으므로
그리고 며칠후, 보건사회부 장관발행의 이주허가서가 집으로 날아왔다.
담당자가 회유하는대로 거짓으로 편지를 썼었다면 처음 것과 다름으로 인하여
그 것때문에 어려움이 있었을 걸로 예상이 되고보면 내 인생.
아니,우리 가족 모두의 인생이 바뀌었을지도 모를 아찔한 순간이였다
좌우지간,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 한다니까...
그렇지만, 고위 공무원이란 자가 국민에게 고작,거짓증언이나 종용하다니.. 참! 한심한 사회다.
위장 이민이라는 타이틀로 이민이 불허되기도 했던 험악한 시절이긴 했어도...
이민, 신청하면 언제 일진 모르지만 오래지 않아 모든 게 새롭게 새출발 할 걸로 생각했는데...
한번의 여권 갱신(그때 최장유효기간이 5년이라)을 하고 총 8년이란 시간이흘렀다.
결코, 짧지않은 시간을
혹시, 내일은..? 하며 앉을 수도 ..그렇다고 설 수도 없이 서성이며 살았다. <계속>